스토너 (STONER)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 셰익스피어 소네트 73
1891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대학에서 농업기술을 배워오길 바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1910년 미주리 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영문학 개론 수업을 듣던 중 아처 슬론 교수가 셰익스피어의 일흔세 번째 소네트의 뜻을 묻는 질문을 계기로 수동적이던 자신의 삶을 조금씩 능동적으로 변화시켜 나가게 된다.
P.20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세상으로 나아가기보다 대학에서 학식을 쌓는 일을 중시하고, 교육자로 살고 싶었던 스토너를 알아봐 주고 이끌어준 아처 슬론 교수로 인해 그는 집으로 돌아와 농업을 이어주길 바라던 부모의 바람을 뒤로하고 교육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에겐 학자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첫걸음이지만, 그의 부모는 이때 인생의 큰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1917년 4월 6일 미국은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그의 친구인 데이브 매스터스와 핀치는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입대한다. 이때 스토너는 다시 한번 아처 슬론의 조언대로 전쟁에 참여하는 대신 학자가 되기 위해 미주리 대학교에 남아 박사학위를 받는다.
P.51
“전쟁은 단순히 수만 명, 수십 만 명의 청년들만 죽이는 게 아냐.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뭔가가 죽어버린다네. 사람이 전쟁을 많이 겪고 나면 남는 건 짐승 같은 성질뿐이야. 나나 자네 같은 사람들이 진흙탕 속에서 뽑아낸 그런 인간들 말일세. “
전쟁이 끝난 후 전쟁터에서 돌아온 교수들과 행정직원들을 위한 리셉션에서 스토너는 부유한 집안의 여성인 파란 눈이 인상적인 이디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온 도덕적 관념에 사로잡힌 예민한 이디스와 서투르기만 한 스토너의 결혼 생활은 그가 상상했던 결혼에 대한 이미지를 상당히 벗어나 있었다. 타인의 시선이 머물 때 이디스는 스토너와 행복하고 단란한 부부관계를 연출하지만, 실제 그들은 무미건조한 일상과 서로의 무관심 속에서 의무감만 가득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예쁜 딸을 낳았지만 변화되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디스는 딸 그레이스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어린 딸을 볼모 삼아 그에게서 떼어놓기 일쑤였으며, 가정 내에 자신의 삶의 형태만 고집하며 가족들에게 히스테릭한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 스토너는 그런 상황을 회피하며 점점 더 무관심해져 갔으며, 그 사이 딸 그레이스 역시 불행해져 갔다.
P. 178
아이도 이제 가끔 미소를 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편안한 태도로 이야기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현실에서 느끼는 무기력함을 외려 편안함과 행복으로 받아들이며, 교육자인 자신의 삶에 더욱 깊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정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교육자로서의 그의 삶은 더욱 견고히 자리를 잡아 간다.
P. 233
”대학은 소외된 자, 불구된 자들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라는 얘기를 했어. 하지만 그건 워커 같은 친구들 이야기가 아니었지. 데이브라면 워커를.. 세상으로 보았을 걸세. 그러니까 그 친구를 허락할 수가 없어. 만약 우리가 허락한다면, 우리도 세상과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은 그 친구를 허락하지 않는 것뿐일세. “
세상은 비합리성과 무지몽매함을 이해해도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서 학문을 익히고 교육을 행하는 자는 세상과 같아서는 승산이 없다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그는 곧 학과장이 될 영문과 교수 로맥스와 등을 지며 그의 편애를 받는 모자란 학업능력과 오만한 태도를 지닌 대학원생인 워커를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합격을 주게 된다. 그리고는 평생 자신에게 닥칠 불합리함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P.301
"장기적으로 내다봤을 때, 날 이 자리에 붙들어둔 것은 이디스도 아니고 심지어 그레이스도 아니오. 반드시 그레이스를 잃을 것이라는 사실도 아니지. 당신이나 내가 상처입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추문 때문도 아니고, 어쩌면 사랑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도 아니오. 그저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 우리의 일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
가정에서 학교에서, 인생이 주는 무게를 묵묵히 참아가며 자신의 길을 가는 교육자 스토너, 그는 대학교에서 만난 캐서린과 새로운 사랑에도 빠져보지만, 그가 결국 선택한 것은 그녀와의 사랑보다도 세상의 일부가 되어 교육자로 살아가는 삶이었다.
P.385
넌 무엇을 기대했나.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며 스토너는 자신에게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 그의 삶은 성공도 실패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삶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
때로는 큰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그것이 무의미가 되기도 하는 굴곡진 인생을 지켜보며, 나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다시 생각했다.
‘머지않아 떠나야 할 것을 잘 사랑하리’
빛과 살포시 내려앉는 그림자 사이의 무게, 솜털에 내려앉은 햇살 한조각 처럼 가볍고도 가벼운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더 기대해야 할까. 삶은 이토록 생동감 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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