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
1890년 1월 9일 - 1938년 12월 25일
체코의 극작가 / R.u.R 유토피아적인 희곡으로, 로봇이란 말을 최초로 세상에 알려준 작가로 유명하다.
카펠 차페크 도롱뇽과의 전쟁 |
도롱뇽과 인간의 대립이라니 재밌는 발상이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민족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전체주의 등을 풍자한다.
19세기 유럽의 시대상을 보면 제국주의의 팽창과 함께 많은 이데올로기들이 생산된다. 원시적이고 미개하다는 이유로 다양한 약소민족들이 자본을 가진 열강에 의해 식민화되고 착취당하게 되며, 이는 이 소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궁금한 점은 그가 문명의 한계를 바라본 관점이다. 그 이유로 도롱뇽이라는 존재를 탄생시킨 그 시발점이 궁금했다. 나는 그의 다양한 견해 중 그가 지식인이자 철학자로서 가지는 문제의식을 [5. 볼프 마이네르트 ] 편을 통해 기술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은 공부와 고민이 필요하지만 우선 생각을 적어보기로 했다.
차페크가 생각하는 문명의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로 나는 그 한계를 동질성이라는 개념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그는 볼프 마이네르트를 통해 인간의 문명은 동질 하지 않은 인간을, 인류라는 동질성으로 강제로 묶으려고 하는 시도에서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P.312
인간의 모든 비극은 그들이 강제로 인류가 되었다는 사실, 아니 그보다는 너무 늦게, 국가, 인종, 신앙, 신분, 계급으로, 빈자와 부자로, 지식인과 비지식인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돌이킬 수 없이 갈라져 버린 후에 인류가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p.313
동질성과 온전한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각자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든가 타자를 모두 절멸시키는 것에 있다.
우리는 모든 공동 사회의 존재에 선행하는 위대한 자연적 전제조건, 즉 동질적인 사회만이 행복한 사회라는 법칙을 위반해 버렸다. 이처럼 획득 가능한 행복을 희생한 대가로 우리는 위대하지만 불가능한 꿈을 꾸었다. 모든 민족, 국가, 계층에서 단 하나의 인류, 단 하나의 질서를 창출하겠다는 꿈 말이다.
그는 사회적 동질성이라는 관념이 인류라는 허구를 창조했다 말한다. 윤리적 법을 생물학적 법보다 상위에 두었다는 것을 문제점으로 비판하면서 말이다. 그는 인간과 달리 도롱뇽들이 보여주는 생물학적 동일성에 기반한 동질성은 통일되고 일관된 무리를 표상한다 말한다.
P. 315
그들 입장에서는 살아가고 번식하면 그만이다. 그들은 서로 간의 불평등에 시달리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행복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동질적이다.
P.316
도롱뇽들은 그들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머지않아 우리가 차이를 창출하고 또 차이를 견뎌 내는 파괴적 이중성을 그들에게 주입할 테니까.
p. 317
도롱뇽들의 세계는 틀림없이 과거 인간세계보다 행복한 세계가 될 것이다. 하나 되고, 동질적이며, 동일한 정신을 따를 것이다.(중략) 도롱뇽 사이에서는 문화적, 계급적 차이는 없고 그저 노동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그는 도롱뇽들이 인간의 문명 속에 자리 잡았으나 원시적인 형태의 본능만으로도 그들은 평등하며, 분화되지 않는 동물 집단이라는 원래의 본질을 바꾸지 않았기에 행복할 수 있다고 본다.
그 반대로 인류의 불행은 생물학적 동질성을 벗어나 분열된 사회적 이질성을 다시 인류라는 윤리적 동질성으로 묶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서 제기되는 또 하나의 의문은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생물학적 동질성이 사회적 동질성 보다 삶을 더욱 행복하게 해주는 조건이냐는 점이다. 문명의 문제점이 동질성과 이질성에 있다면, 동질성 자체는 벌써 이질성을 나타낸다는 말이 된다.
그가 말하는 문명이라는 개념의 한계는 문명 그 자체에 이질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대적 한계성으로, 사실 동질성이라는 규정 자체가 이질성을 전제하며, 이질성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의 동질성 개념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도롱뇽들의 동질성은 이미 인식에 기반한 동질성이다. 문명 속에서만이 동질성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이질성을 느껴야 동질성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P. 373
모든 도롱뇽들은 평등하단 말이야. 전부 도롱뇽들이잖아.
모두 똑같은 골격을 가졌고, 똑같이 못생기고, 똑같이 어중간해.
그가 말하는 도롱뇽의 동질성은 사람의 시각으로 보는 생물학적 동질성이다. 마치 백인이 황인종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인식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그 동질성은 이질성, 즉 차별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도롱뇽은 동질 하지 않다.
그들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동질 한 것이 아니다. 동질 하다는 인식 자체가 처음부터 문명의 한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도롱뇽이 동질 하다는 것은 사람과 종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도롱뇽은 사실 그들 안에서는 동질 하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와 형태로 이질적일 것이다. 원래 문명이란 그렇게 차별과 이질성을 전제로 배타적인 동질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들이 행복한 것은 생물학적 동질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도롱뇽이 생물학적 동질성이 있기에 더 행복하다는 그의 생각은 그가 주장하는 문명의 한계점 이전에, 이미 스스로도 문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이 문제점은 [11. 작가, 혼잣말을 하다]에서 잘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작가 자신이 결론을 내린 것처럼, 인간이 문명을 이룩한 이래 동질성과 이질성으로 서로 반목하고 대립했던 것처럼, 도롱뇽도 인간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 서로 대립하고 절멸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이다.
P. 372
잠깐 - 사람 대 사람!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는데 어쩌면 결국 나중에는 도롱뇽 대 도롱뇽 구도가 될지 모르겠군.
그가 처음 도롱뇽을 등장시킨 이유는 인간과 다른 존재가 문명을 발전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이었지만, 동질성에 대한 그의 생각이 결국 인간의 문명과 차별된 것이 아닌 그들도 인간의 문명 그대로를 답습해 버리는 결과로 도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생각된다.
도롱뇽이 절멸하고 인간이 살아남는 결론은 차페크가 개별 사람에게 갖는 애정, 즉 휴머니즘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가 말한 대로 동질성과 이질성의 문제로 유기체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개념 하에서는 결단코 유기체는 분열의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P. 372
도롱뇽들은 단일한 속이란 말이야. 인간도 단일한 속이야, 친구. 단일한 속인데, 별별 것 갖고 싸워 대잖아!
문명의 분명한 한계는 동질성과 이질성을 요구한다는 데 있다. 그게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
생명을 가진 유기체는 문명이 말하는 동질성의 폭력을 벗어나야 개체 하나하나 존재해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사실 종적 동질성과 종적 이질성을 벗어난 차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차페크가 인류보다 개인을 중요 시 생각했듯이, 생물학적, 사회적 동질성을 버리고 그저 각자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면, 분명 문명의 한계도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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