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버지스
1962년 대표작 [시계태엽 오렌지] 발표
1971년 스탠리 큐브릭 동명의 영화 [A Clockwork Orange]로 유명해 짐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의 의미를 묻는 20세기 문제작
줄거리
열다섯 살의 비행 청소년 알렉스는 폭력, 강간, 절도, 살인 등의 범죄행위를 일삼는다. 그러다 패거리의 배신으로 범죄 현장에서 붙잡혀 교도소에 수감되고, 교도소에서 나가는 조건으로 조건 반사 원리에 바탕을 둔 세뇌 훈련 프로그램인 루도비코 요법 실험에 지원한다. 외부의 힘에 의해 태엽이 감겨야 움직일 수 있는 인간상에 대한 반성을 제시한다.
서평
" 어떤 정부라도 버젓한 젊은이를 태엽으로 돌아가는 기계로 만드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되지, 그건 탄압을 자랑스레 여기는 정부나 하는 것이야. "
앤서니 버지스는 인간의 폭력성을 쉽게 선과 악의 명쾌한 도덕적 잣대로 바라본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보았다. 그는 인간의 폭력성을 선과 악으로 대치시켜 악을 억압하는 것이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선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고 인간은 선을 선택할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봤으며, 그것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자율의지이기에 무엇도 인간이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율의지를 빼앗을 수 없다 말한다.
선택할 수 없다면 인간이 아니라고.
선악의 윤리적 잣대를 제거한 폭력은 개인과 국가를 구분하지 않고 폭력 그 자체만 바라보게 만든다.
버지스는 개인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과 국가가 한 인간에게 사회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가하는 폭력을 동일하게 바라봤다.
정의는 진정 정의로운 것인가?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범죄자를 교화한다는 목적하에 이루어지는 사회적 정의에 숨겨진 정치적 의도와 폭력성을 보여줌으로써 선과 악의 경계를 해체한다. 그리고 그는 극단적으로 알렉스와 같은 죄책감이 전혀 없는 인물을 내세워,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자일지라도 우리는 그를 인간으로 사랑해야 하고, 그가 인간이라는 전제하에 국가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기계처럼 인간을 개조할 권리는 없다고 말한다.
앤서니 버지스가 인간의 폭력성을 리버럴 하게 본다 해서 폭력을 옹호하거나 미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우리가 쉽게 우리의 자유를 억압당할 수 있는 국가 권력, 즉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료주의나 선전선동을 하는 언론 등 외부의 요인들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내재된 폭력성이 있다고 봤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이 실존하는 하나의 의미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살아있는 폭력성을 악으로 규정지어 인간을 수동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큰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의 권력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세질 때, 이것이 전체주의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 역설적이게도 국가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것이 반대로 알렉스 개인의 폭력성을 외려 별게 아닌 듯 치부해 버리는 듯한 느낌도 받게 한다.
이 소설을 통해 나는
우리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범죄자 개인에게 행해지는 사회적 폭력을 다수가 안전하고 편하다는 이유로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범죄자에게도 자율의지로 변화를 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인가?
어쩌면 가해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피해자에게는 더욱 큰 폭력이 아닐까.. 하는 여러 가지 고민을 해본다.
소설 속 상황으로 보면 이러한 물음은 어쩌면 너무 쉬운 답을 도출할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인간의 자율의지는 국가의 권력에 의해 꺾여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이렇게 단순할까..
또 하나의 의문점은 인간은 결국 선함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과연 알렉스와 같은 범죄자에게 선택 가능한 선함이 존재하는가??? 도 의문이다.
작가는 또 다른 사례를 통해 이 물음에 대답한다.
알렉스에게 피해를 당했던 노신사와 아내를 잃은 작가, 알렉스 대신 부모님께 아들 노릇을 하던 조를 통해 인간은 언제든 상황에 따라 자신이 당한 만큼 누군가에게 복수할 기회가 주어지거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선량해 보이는 인간들도 폭력성을 발휘하는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선악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변화하는 존재이고 그것이 또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선량한 사람도 폭력성을 발휘할 수 있고 때로는 억울하게 국가로부터 알렉스처럼 본능을 거세당하는 피해를 입을 수 있기에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작가는 알렉스의 폭력성을 다시 되돌려 놓는다.
그는 폭력성은 선함과 함께 인간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하나의 무기이며, 그 어떤 것보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알렉스 역시 권력에 의해 본능이 거세되는 방식이 아닌 스스로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으로 남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책을 읽어도 결론은 쉽게 나지 않는다.
p.270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쪼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서 태엽을 드르륵드르륵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쪼끄만 기계 중 하나와 같은 거야.
나는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보이는 작가의 시선이 너무 낭만적인 것 같아서 생각이 많아진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 본성과 자유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마지막 추가된 스토리 상에서는 어쨌든 그는 인간이란 존재를 십 대의 청소년 시기처럼 미성숙하거나 미완성된 존재로 바라보았고, 인간의 폭력을 한때의 치기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1963년 미국의 노턴 사가 에필로그를 빼고 출판하기로 판단한 것은 정말 잘한 것 같다. 민음사에서는 영국 판에서와 마찬가지로 뒤 이은 에필로그까지 포함시켰지만, 에필로그의 내용은 정말 와닿지 않는 내용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단순한 구도로만 본다면 당연히 자유주의에 한 표를 던지겠지만, 이보다 더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는 전체주의만큼 위험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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